♪♪ 음악 배달부 2 ♪♪/추억의 음악실

♡부 용 산 / 한 영 애(박기동 시/안성현 곡)♡

시그널북(루고김) 2008. 2. 17. 22:07

♡부 용 산 / 한 영 애(박기동 시/안성현 곡)♡
1절(1947)
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붉은 장미는 시들었구나 
부용산 산허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2절(1999)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데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 - 한영애♡
    
    ♡부용산 - 안치환♡
    
    ♡부용산 - 이동원♡
    
    ♡부용산 - 국소남♡
    
    ♡부용산 - 박흥우(바리톤)♡
    
    
     가곡 "부용산" (芙蓉山)노래 내력을 알아봅니다.
    부용산 노랫말은 1947년에 쓴 박기동의 시(詩)입니다.
    시인의 아버지였던 박준태의 3남3녀 가운데 차녀였던
    애영은 18세의 나이로 벌교 세망동으로 시집을 가지만,
    몸이 허약했던 누이는 자식도 낳지 못한 채 
    1947년 폐결핵으로 순천 도립병원에서 세상을 뜹니다. 
    누이를 부용산 자락에 묻고 돌아오는 길에 쓴 시입니다.
    이 시에 곡을 붙이게 된 사연은-- 
    박기동 시인이 목포 항도여중 재직중, 문학도였던 
    제자 김정희(항도여중3)가 폐결핵으로 죽었다 합니다. 
    제자의 죽음을 슬퍼하던중 동료교사였던 안성현선생은 
    박기동선생이 써놓은 시를 보고 여기에 곡을 붙혀 
    "부용산" 노래가 완성 되었습니다. 
    이 시에 작곡을 한 안성현은 목포 항도여중 음악교사였고 
    '엄마야 누나야' 라는 동요의 작곡자입니다. 뒤에 안성현은 
    월북을 했고, 이 노래는 당시 빨치산이 즐겨 불렸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습니다.
    이 노래는 박기동이 병으로 죽은 누이동생을 그리며 가사를 
    쓴 곡으로 가락도 서정적이지만, 구전을 통해 널리 퍼지면서 
    호남 지역 빨치산들의 애창곡이 되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금기시 되었다.
    아름다운 노래말과 애절한 곡조로 사랑받았던 노래<부용산>의 
    시비가 1999년10월1일 보성군 벌교읍 부용산 오리길에 세워진 것. 
    제막식에는 노랫말을 쓴 시인 박기동(82·호주 시드니 거주)씨 와 
    작곡가 고 안성현의미망인 송동을씨와 많은 출향민이 모여들었다.
    벌교읍은 참꼬막으로 유명한 조그마한 시골읍이다.
    그냥지나치면 시골읍에 불과하지만, 알고보면 사연이 많은 곳,
    소설"태백산맥"에서 많이알려진곳,이를토대로 영화도 만들어졌다.
    벌교근교에는"홍교"도 있고, 부용교,부용산,현부자네집 
    낙안읍성과 송광사 보성읍엔 서재필박사기념관 과 서편재
    시작지인 강산리 그리고 우가락을 만들어가는 보성의소리꾼
    조상현 선생과 녹차밭과 해수탕 등등 
    벌교인들의 마음속에 가슴절이며 애절하게 불리워졌고, 
    호남인들의 마음속에 아름다운 전설처럼 입으로 입으로 
    불리워 졌으며 "엄마야 누나야" 로 우리에게 친숙한 노래의 
    작곡가 안성현씨가 가족을 데리고 월북을 하고 빨치산이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이념이나 사상과 무관한 이 노래가 금지곡이 
    되었던 "부용산오리길" 
    부용산 노래가 벌교인들의 가슴속에 오랫동안 담겨져 오다가 
    마침내 반세기가 조금 지난 이제 벌교인들의 곁으로 돌아왔다.
    박기동 시인은 누이동생의 짧은 생애가 애달퍼 벌교사람들이
    『절산』이라 부르는 부용산 자락에 누이를 묻고 돌아오면서
    "푸르디 푸른 하늘" 을 다시는 바라볼 수 없는 누이동생이 
    안쓰러워 가슴을 저미며 이 시를  쓴 것이며 "피어나지 못한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라는 표현은 여동생이 결혼을 하였으나 
    자식을 낳지 못하고 고운 나이에 죽음을 맞이 하였기에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박기동 시인의 사랑하는 누이동생(박영애)의 무덤은 
    지금도 부용산 산자락에 고요히 묻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