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朴寅煥) 詩人의 [목마와 숙녀] / 박인희 낭송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가슴에 가볍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등대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희는 숙명여대 불문과에 다니던 1972년 이필원과 함께 혼성 듀엣 [뚜와에 므와]를 결성해 가요계에 데뷔했다. [약속][세월이 가면][그리운 사람끼리]등 매력있는 음색과 호소력이 강한 화음으로 데뷔한지 불과 1년도 안돼 스타덤에 올라섰으나, 이 그룹은 72년 박인희의 결혼으로 해체되고. 두 사람은 각기 독립했다.
박인희는 74년 2월 첫 독집앨범 발표이후 76년까지 여섯장의 앨범과 한 편의 시낭송 음반을 발표했다. 시낭송 음반에는[얼굴]과 [한잔의 술을 마시고..]로 시작되는 박인환시인의 [목마와 숙녀]등이 담겨 있었다.
당시 파격적이었던 이 음반은 큰 인기를 얻었다.71년 동아방송 [3시의 다이얼]로 DJ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방송 DJ 뿐 아니라, [지구의 끝에 있더라도]등 두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수필집을 펴낸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가수로 활동했던 기억이 아련할 정도로 DJ로서 더 오랫동안 대중과 만났지요. (가수 박인희)가 오래 기억된 것처럼 방송인으로서도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라는 본인의 술회와 같이 그녀는 방송에 대한 애착이 커서인지 한때 LA 한인방송 라디오 프로를 진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을뿐이다.
그리고 남편에 대한 것은 거이 없습니다. 미국에서 살면서 한인방송 을 했지만 방송국에서도 연락인 안돼고 있으며 남편과는 이혼한 상태이고, 슬하에는 아들 한명 있는데, 이름은 환 이고, 성은 모른다. 아들은 현재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해인 수녀님과 풍문여중 동창으로.. 편지로만 친하게 지낸 사이라고 한다. 현재 한국에 머물고 있는 것은 확실한데..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려진 것이 없다.
시인 박인환(朴寅煥). 가수 박인희.
〈목마와 숙녀〉와 〈세월이 가면〉과 수십편의 주옥같은 시를 남기고 3월 20일 31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시인 박인환(朴寅煥).
그는 1926년 8월 15일 소양강 상류에 위치한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상동리 강촌 마을에서 4남 2녀중 맏아들로 태어났고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하고 평양의전을 중퇴하였습니다.
1946년 『거리』『군상』을 발표 등단하였고,『아메리카 영화시론』등 영화평을 쓰기도 하였으며, 1949년 시집『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면서 모더니즘의 기수로 활동했습니다.
1949년 "경향신문"의 기자와 1951년 종군기자로 활약하면서『박인환 선시집』을 간행했습니다.
1956년 3월20일 저녁9시, 세종로 자택에서 눈을 감지 못한채 심장마비로 급사하였습니다. 시인 『이상』을 기리며 사흘간 쉬지 않고 마신 술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문우들은 그의 무덤에 평소 좋아하던 술 조니워커와 카멜담배를 함께 묻었다는 일화가 전합니다. 박인희, 1969년 어느 날 청아한 음색과 시적인 감성으로 음악 펜들을 열광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 넣은 혼성 듀엣 '뚜와 에 무와'의 박인희가 혜성처럼 나타나 불렀던 노래입니다.
당시 숙명여대 불문과에 재학 중이던 박인희는1946년 3월 15일생으로 엘리트 가수였습니다. `이필원`과 팀을 이루어 『약속』『세월이 가면』등으로 인기를 휘몰아 많은 펜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면서 인기 절정에 올랐습니다.
1972년 결혼과 함께 1년여 만에 솔로로 독립하게 되는데, 그녀는 솔로로 데뷔 후 1972년에 첫 히트곡으로 '모닥불(자작곡)'을 내놓은 후,
'봄이 오는 길' '끝이 없는 길' '눈빛만 보아도' '하얀 조가비' '미루나무' '장미꽃 필 때면' '젊은 날의 우리들' '모래알' '방랑자' `그리운 사람끼리(자작곡)등의 히트곡을 발표했습니다. 가수 생활은 불과 7년여밖엔 하지 않았습니다.
`박인환(1926년생)` 과 이름도 비슷한 `박인희(1946년생)`는 박인환 의 시 《세월이 가면》을 히트시킨 후, 노래로 부르기 어려운 박인환 시를 시낭송으로 발표하며 펜들의 마음을 어루만졌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목마와 숙녀》 입니다. '세월이 가면'이란 시와 노래가 탄생한 것은 1956년 전란 이후 막 서울로 환도한, 아직도 쌀쌀한 봄 어느 날, 을지로 입구 은성주점에 둘러앉았던, 시인 김광주, 송지영, 조병화 그리고 박인환, 가수 나애심, 작곡가 이진섭 등이 주흥이 좀 시무룩해지자 가수 나애심에게 노래 한 곡을 주문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녀는 마땅한 노래가 없다면서 계속 고개를 흔들었는데, 그때 박인환이 호주머니를 뒤지더니 구겨진 종이를 꺼내 즉석에서 《세월이 가면》이란 시를 써 내려갔고, 이를 본 작곡가 이진섭은 흥얼거리며 역시 즉석에서 곡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진섭이 나애심에게 악보를 건넸을 때, 당대 최고의 가수의 입에서 서늘한 노랫말과 군더더기 없는 곡조가 울려 퍼지기 시작, 마지막의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은 노랫말의 여운을 위해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즉흥적으로 낭만적인 한 편의 시와 노래가 탄생되었고 박인희는 이를 히트시키면서 박인환의 시를 부활시켰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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