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라는 어느 시인의 싯구를 떠올리며 생각한다. 얼마나 그리움이 컸으면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다고 했을까. 아마도 시간이 오래 흘러도 마음을 닫지 않고 기다리고 싶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70년대 라디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면 모두 그 음악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겨울의 깊은 밤을 추위도 잊은 채 보냈다. 그때 혹, 생각을 켜놓았던 그는 아니었을까? 노래 속 그 목소리가 그리웠다면 이제 생각을 켜놓은 채 잠들 필요가 없다. 곧 그를 만나게 될 것이므로.
'하얀 조가비' '그리운 사람끼리' '방랑자' '모닥불' '끝이 없는 길' '스카브로우의 추억' '세월이 가면'등의 노래제목을 들으면 떠오르는 목소리가 있다. 바로 70년대 대학생들의 우상이었던 1세대 여성 포크가수 박인희(朴麟姬). 특유의 맑은 음성과 단아하게 빗은 긴 머리로 남학생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혼성 뚜엣 '뚜아 에 무아(Toi et Moi)'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를 낭송해 큰 호응을 얻기도 했던 그의 노래는 대학생들의 MT에서 캠프파이어를 할 땐 반드시 등장하는 인기곡들이었지만 1981년 그는 미국으로 홀연히 떠났고 소식을 감췄다. 도중에 은퇴와 컴백설이 나돌기도 했지만 미국 잠적설에 대한 뚜렷한 이유는 들을 수 없었다. 후에 그녀의 수필집 <우리 둘이는>에 의하면 '절정의 순간에 타성이 깃든 자신을 발견했다'는 것이 그 이유라면 이유다.
그렇게 그녀의 은둔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팬들은 박인희의 목소리를 잊어가는 듯했으나 워낙 맑고 고운 음색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밤이면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소리를 낮추어 따라부르던 그 목소리를 어떻게 잊겠는가. 어린 나의 가슴에도 그의 '하얀 조가비'는 천사의 음성처럼 남아 있었다. 팬들은 떠나보낸 가수의 근황을 기다리며 그가 돌아오기만을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그가 일흔을 넘어선 나이에 돌연 재출발을 알렸다. 인생2막에 용감하게 도전장을 낸 것이다. 박인희를 오랜 은둔에서 끌어낸 것은 역시 그녀의 귀환을 기다리는 팬들의 사랑이었다. 수십년동안 박인희의 컴백을 기다리는 팬클럽 회원이 1400명이나 있고, 10여년 전 미국에서 우연히 만난 팬이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이민와서 힘든 시기를 박인희의 노래로 견뎠다는 그 팬은 박인희의 음반을 수십장이나 가지고 있었다.

새 곡을 60여곡이나 만들며 준비도 했다. 상반기에는 콘서트 '그리운 사람끼리'를, 하반기에는 새 앨범도 내놓을 계획이다. 가수가 아닌 일반인으로 살면서 가슴에 모였던 곡들이다. 박인희의 컴백 무대는 4월30일 오후 7시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내 올림픽홀에서 시작해 5월에는 경기도 고양시와 수원, 그리고 대전 등지에서 열릴 예정이다. 콘서트에서는 우선 팬들을 위해 옛 히트곡들을 송창식과 함께 부를 예정이다. 옛 혼성뚜엣 시절의 분위기를 회상해 볼 수 있는 무대가 되기도 할 것이다.
사실 그동안 추억속의 가수들이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활동을 시작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여왔다. 김추자, 윤수일, 윤항기에 이어 정미조까지 '왕년의 스타'들의 컴백설은 그들을 기다리던 대중들에게 타임머신을 타듯 다시금 시간을 거슬러올라 그 시절로 데려다 주는 빛이 되었다. 하지만 일부 긴 공백기 동안의 여백을 채우는 과정에서 기대보다 못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연이어 줄을 잇는 그들의 가요계 등장을 두고 우려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 것이 사실이고 보면 이번 박인희의 컴백은 또 한번 대중의 기대를 모으는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다. 그녀의 컴백을 알리는 서울 그랜드 호텔 기자회견장에 이제는 머리 희끗한 중년의 팬클럽 회원들이 꽃다발을 들고 찾아와 그녀의 노래에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쳤다. 긴 세월이 지나 간절한 기다림을 만난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눈물 이상의 사랑이라는 것을 안다. 또한 일흔이 넘어 다시 내딛기 시작하는 그녀의 인생을 향한 박수이기도 할 것이다. 운이 좋아 참석한 그 자리에서 나는 풀어진 어깨에 다시 한 번 힘을 넣었다. 역시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 흘러간 지 오래다.